원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입니다.
해당 번안의 모든 저작권은 Redstonewisdom.com에 있습니다.
국내 그 어떤 번안도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틈틈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충분히 좋아지고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께서는 편하게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
Note:
“Selbst-Überwindung”을 “자기초월”이 아니라 “자기극복”으로 번안한 이유는, 단어 “Überwindung”가 가진 투쟁과 저항의 뉘앙스를 “초월”이라는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Überwindung는 독일어 동사 “Überwinden”에서 파생된 명사로, 기본적으로 번역에서 “극복하다”, “넘어서다”, “초월하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뉘앙스는 영어 “to overcome”, 즉 ‘극복하다’, ‘이기다’, ‘이겨내다’에 더 가까운 의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본래 시적인 운율과 철학적 리듬이 강한 텍스트이므로, 이번 번안에서는 원문의 어순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부 – 자기극복에 대하여 (Von der Selbst-Überwindung)
“그대들 현자들이여, 그대들을 몰아가고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진리를 향한 의지’라고 부르는가?
나는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 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라고!
그대들은 모든 존재를 먼저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것이 이미 사유 가능한지에 대해 타당한 불신을 품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는 그대들 앞에 굴복하고 몸을 굽혀야 한다!
그대들의 의지는 그렇게 원한다.
존재가 매끄러워지고 정신에 종속되어, 정신의 거울이자 그 반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의 모든 의지다, 그대 현자들이여.
일종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인 것이다.
그대들이 선과 악에 대해, 그리고 가치 평가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렇다.
그대들은 여전히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자신들이 무릎 꿇을 수 있는 세계를 말이다.
그것이 그대들의 마지막 희망이며 황홀한 도취다.
물론 지혜롭지 못한 자들, 즉 민중은— 강물과 같다.
그 위로 가치 평가라는 손님들을 태운 나룻배가 떠내려간다.
그 손님들은 가면을 쓰고 엄숙하게 앉아 있다.
그대들은 자신의 의지와 가치를 생성의 강물 위에 올려놓았다.
민중이 선과 악이라고 믿는 것 속에서, 오래된 힘에의 의지가 내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대들이었다, 현자들이여, 그런 손님들을 이 나룻배에 태우고 그들에게 화려함과 자랑스러운 이름을 붙여준 것은— 바로 그대들과 그대들의 지배하는 의지였다!
이제 강물은 그대들의 나룻배를 더 멀리 실어 나른다. 실어 나를 수밖에 없다.
부서진 파도가 거품을 일으키며 배 밑바닥에 분노로 부딪친다 한들, 그것은 사소한 일일 뿐!
그대들의 위험은 강물이 아니다, 현자들이여. 그대들의 선과 악의 종말도 아니다.
진정한 위험은 저 의지 자체, 즉 힘에의 의지— 그 지칠 줄 모르고 생성하며 창조하는 생명의 의지다.
하지만 그대들이 선과 악에 대한 나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삶에 대해,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살아있는 것을 뒤쫓아 다녔다. 그것의 본성을 알기 위해 가장 큰 길부터 가장 작은 길까지 걸었다.
백 개의 거울을 통해 나는 그 시선을 붙잡았다. 그 입이 닫혀 있을 때조차 그의 눈이 내게 말하도록. 그리고 그의 눈은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 곳 어디서나, 나는 또한 복종에 대한 말을 들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복종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다.
스스로에게 복종할 수 없는 자는 명령을 받는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의 본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들은 세 번째다. 명령하는 것은 복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
명령하는 자가 모든 복종하는 자들의 짐을 질 뿐 아니라, 그 짐이 쉽게 그를 짓눌러 부술 수도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명령 속에는 하나의 시도와 모험이 내게는 보였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은 명령할 때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건다.
그렇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조차도 여전히 그 명령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의 법 앞에서 스스로 재판관이자 복수자이며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이 살아있는 것을 설득하여 복종하게 하고 명령하게 하며, 명령하면서도 복종을 실천하게 만드는가?
이제 나의 말을 들어라, 그대 현자들이여! 진지하게 검토해 보라— 내가 삶 자체의 심장 속으로, 그 심장의 뿌리까지 파고들었는지를!
내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 곳 어디서나, 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심지어 섬기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도록 설득하는 것은 약한 자 자신의 의지다.
그는 자신보다 더 약한 자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쾌락만은 그가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작은 것이 더 큰 것에 자신을 내주어 가장 작은 것에 대한 쾌락과 힘을 누리듯이, 가장 큰 것 또한 자신을 내던져 힘을 위해— 생명마저 건다.
가장 위대한 자의 헌신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모험이며 위험이고, 죽음을 걸고 벌이는 주사위 놀이다.
그리고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시선이 있는 곳, 거기에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가 있다.
약자는 은밀한 길을 따라 성채 안으로, 강력한 자의 심장 속으로 살며시 기어들어가— 거기서 힘을 훔친다.
그리고 이 비밀을 삶 자체가 내게 속삭여 주었다. “보라,” 삶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다.”
“물론, 그대들은 이것을 생식(生殖)에의 의지라거나, 혹은 목적, 더 높은 것, 더 먼 것, 더 다채로운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하나의 비밀이다.”
“나는 이 하나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몰락하겠다.
그리고 진실로, 몰락과 낙엽 지는 곳이 있는 곳에, 보라, 삶은 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내가 투쟁이어야 하고 생성(Werden)이어야 하며 목적이자 목적들의 모순이어야 한다는 것.
아, 나의 의지를 간파하는 자는 그것이 얼마나 굽은 길들을 가야만 하는지도 아마 간파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든— 나는 곧 그것의 적이 되어야 하고, 내 사랑의 적이 되어야 한다. 나의 의지는 그렇게 원한다.”
“그리고 그대, 인식하는 자여, 그대 역시 내 의지의 한갓 길이며 발자국일 뿐이다.
진실로, 나의 힘에의 의지는 그대의 진리를 향한 의지의 발 위에서도 걷는다!”
“물론, ‘생존에의 의지(Wille zum Dasein)’라는 말로 진리를 쏘려 했던 자는 진리를 맞히지 못했다. 그런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원할 수 없고, 이미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어찌 더 존재하기를 원하겠는가!”
“오직 삶이 있는 곳에만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내가 그대에게 이렇게 가르치노니—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다!”
“살아있는 자에게는 삶 자체보다 더 높이 평가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 평가함 자체로부터 말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다!”—
삶은 일찍이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나는 그대들, 현자들이여, 그대들 마음의 수수께끼 또한 풀어준다.
진실로 그대들에게 말한다. 영원불멸하는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로부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대들의 가치들과 선과 악이라는 말들로써 그대들은 힘을 행사한다, 오 가치를 평가하는 자들이여!
그리고 이것이 그대들의 숨겨진 사랑이며 그대들 영혼의 빛남과 떨림과 넘쳐흐름이다.
하지만 그대들의 가치들로부터 더 강한 힘과 새로운 극복이 자라난다. 그것에 의해 알과 알껍데기는 부서진다.
그리고 선과 악 안에서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진실로 먼저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부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이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다.—
우리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자, 현자들이여, 비록 그것이 나쁜 일이라 할지라도.
침묵은 더 나쁘다. 침묵 속에 감춰진 모든 진실은 독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진실들 앞에서 부서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서지게 하라!
아직 지어야 할 집은 많이 남아 있으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자기극복에 대하여』 해설
「자기 극복에 대하여(Von der Selbst-Überwindung)」는 니체 철학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정면으로 다루며, “삶이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의지다”라는 통찰을 밀도 높게 펼쳐 보이는 장입니다.
니체는 이 장에서 소위 ‘진리를 향한 의지’마저도 더 근원적인 힘에의 의지의 한 표현임을 밝히고, 복종과 명령, 사랑과 희생 등 모든 생명 현상의 배후에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힘이 역동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1️⃣ 진리를 향한 의지? 아니, 힘에의 의지다!
💡 “그대들 현자들이여, 그대들을 몰아가고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진리를 향한 의지’라고 부르는가? 나는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 가능하게 만들려는 의지라고!”
니체는 전통 철학이 고귀하게 여겨온 ‘진리 추구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현자들은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고, 측정하고, 개념화하여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행위가 객관적 진리 탐구가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이성 앞에 굴복시키고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려는 힘에의 의지의 한 표현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선과 악, 가치를 논할 때조차, 그들은 자신들이 무릎 꿇을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며 황홀한 도취”입니다.
💡 통찰: 진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지배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힘에의 의지가 투사된 창조물일 수 있다.
2️⃣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복종한다 — 그러나 스스로에게!
⚓ “내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 곳 어디서나, 나는 또한 복종에 대한 말을 들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복종하는 존재다.”
니체는 생명의 본성을 ‘복종’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지만, 이것은 결코 수동적인 굴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① 모든 생명은 복종한다. ② 스스로에게 복종하지 못하는 자는 외부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③ 명령하는 것은 복종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조차 그 명령의 대가를 치르고 스스로 재판관이자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생명이 외부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법칙이나 내면의 필연성에 자율적으로 복종하며 자신을 넘어서는 과정, 즉 자기 극복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 주제: 삶은 타율적인 억압에 대한 수동적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를 명령하고 그 명령에 복종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투쟁 과정이다.
3️⃣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생명의 근원적 박동
❤️🔥 “내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 곳 어디서나, 나는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심지어 섬기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생명 현상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근본적인 힘으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배욕이나 생존 본능을 넘어, 자신을 확장하고, 더 강해지고, 더 많은 것을 창조하고,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존재론적인 충동입니다.
이 의지는 심지어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는 모습 속에서도(더 약한 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사랑과 희생 속에서도(강자의 마음을 얻어 힘을 훔치려는 방식으로) 발견됩니다. 가장 위대한 자조차 힘을 위해 생명을 걸고 위험을 감수합니다.
🔥 니체의 급진성: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은 이성이나 도덕, 혹은 단순한 생존 욕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고 더 강한 힘을 추구하는 ‘힘에의 의지’이다.
4️⃣ 삶은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영원한 투쟁과 생성
🎭 삶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다. … 진실로, 몰락과 낙엽 지는 곳이 있는 곳에, 보라, 삶은 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 내가 투쟁이어야 하고 생성(Werden)이어야 하며 목적이자 목적들의 모순이어야 한다는 것…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곧 나는 그에 맞서고, 내 사랑의 적이 되어야 한다. 나의 의지는 그렇게 원한다.”
삶 자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자신의 비밀을 속삭입니다.
삶은 완성된 상태나 정적인 평화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고 변화하는 영원한 투쟁이자 생성(Werden)의 과정입니다.
삶은 창조와 파괴, 사랑과 적대라는 모순을 끌어안고 있으며, 심지어 몰락과 희생 속에서도 힘을 추구합니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자기 극복의 과정이야말로 삶의 본질입니다.
🎭 비유적 핵심: 삶은 평온한 안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제물로 바치며 더 높은 힘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인 투쟁과 변신의 과정이다.
5️⃣ 진리, 생존 본능을 넘어서: 가치 평가와 힘에의 의지
🧭 “오직 삶이 있는 곳에만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내가 그대에게 이렇게 가르치노니—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다!”
니체는 쇼펜하우어 등의 ‘생존에의 의지(Wille zum Dasein)’ 개념을 단호히 부정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더 강하게, 더 높이, 더 풍성하게 존재하기를, 즉 힘을 증대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이 힘에의 의지의 표현입니다(“살아있는 자에게는 삶 자체보다 더 높이 평가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 평가함 자체로부터 말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다!”).
심지어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도 근본적으로는 세계를 자신의 힘 아래 두려는 힘에의 의지의 한 표현일 뿐입니다.
🧭 결론: 철학, 도덕, 과학 등 인간의 모든 가치 평가와 인식 활동은 중립적인 탐구가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세계를 해석하고 자신의 힘을 확장하려는 ‘힘에의 의지’의 다양한 표현 방식이다.
6️⃣ 가치는 영원하지 않다: 창조를 위한 파괴의 필연성
💣 “진실로 나는 말한다. 영원불멸하는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로부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한다.”
니체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도덕적 가치를 부정합니다.
모든 가치는 특정 시대와 조건 속에서 힘에의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힘이 등장하면 반드시 극복되고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를 깨뜨리는 파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선과 악 안에서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진실로 먼저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부술 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최고의 악’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하기에, 역설적으로 ‘최고의 (창조적인) 선’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침묵 속에 숨겨진 진실은 독이 된다고 경고하며, 진리 앞에서 부서질 수 있는 모든 낡은 것을 과감히 부수고 “아직 지어야 할 많은 집들”(새로운 가치들)을 세울 것을 촉구합니다.
💣 급진적 선언: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한다. 진정한 창조는 기존 가치의 파괴를 동반하며, 가장 높은 선은 가장 깊은 악(기존 질서의 파괴)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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