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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부 – 고귀한 자들에 대하여 (Von den Erhabenen)
내 바다의 밑바닥은 고요하다.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 깊이에 장난기 넘치는 괴물들이 숨어 있음을!
나의 흔들림 없는 심연은 떠다니는 수수께끼와 웃음으로 반짝인다.
오늘 나는 한 ‘고귀한 자(Erhabenen)’를 보았다.
근엄하고 엄숙한 자, 정신의 고행자였다.
아, 내 영혼은 그의 볼품없는 모습에 얼마나 웃었던가!
가슴을 한껏 내밀고 숨을 참는 사람처럼,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고귀한 자는, 말없이.
그는 추한 진실들, 즉 그가 사냥해서 얻은 전리품을 주렁주렁 매달고, 찢어진 옷을 걸쳤으며, 온몸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장미 한 송이 보지 못했다.
그는 아직 웃음도, 아름다움도 배우지 못했다.
인식의 숲에서 돌아온 이 사냥꾼은 어둡기만 하다.
야수들과의 싸움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진지함 속에는 여전히 야수가— 아직 극복되지 않은 야수가 엿보인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듯한 호랑이처럼 그는 버티고 서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잔뜩 긴장한 영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취향은 이 모든 움츠러든 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취향과 맛에 대해서는 다툴 수 없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모든 삶은 취향과 맛을 둘러싼 투쟁이다!
취향— 그것은 무게이자 저울이며, 또한 무게를 다는 자다.
무게와 저울과 무게 다는 자에 대한 투쟁 없이 살아가려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화 있으라!
만약 이 고귀한 자가 자신의 그 고귀함에 지치게 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의 아름다움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를 맛보고 음미할 만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때,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것이며— 진실로! 자신의 태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그늘 속에 앉아 있었다.
정신의 고행자인 그의 뺨은 창백해졌고, 그는 자신의 기대 속에서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경멸이 서려 있고, 그의 입가에는 혐오가 숨겨져 있다.
그는 지금 쉬고 있지만, 그의 휴식은 아직 햇볕 아래 놓이지 못했다.
그는 황소처럼 되어야 한다. 그의 행복은 땅의 냄새를 풍겨야 하며, 대지를 경멸하는 냄새가 풍겨서는 안 된다.
나는 그를 흰 황소로 보고 싶다— 콧김을 내뿜고 포효하며 쟁기보다 앞서 나아가는 황소로!
그리고 그의 포효는 마땅히 땅 위의 모든 것을 찬양해야 한다!
그의 얼굴은 아직 어둡다. 손의 그림자가 그 위에서 어른거린다.
그의 눈 속의 의미는 아직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그의 행위 자체가 여전히 그를 덮는 그림자다.
손이 행위자를 어둡게 만든다.
그는 아직 자신의 행위를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나는 그의 황소 같은 목덜미를 사랑한다.
— 하지만 이제 나는 천사의 눈 또한 보고 싶다.
그는 자신의 영웅적인 의지 또한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내게 단지 ‘고귀한 자(Erhabener)’가 아니라, ‘높이 들어 올려진 자(Gehobener)’여야 한다.— 의지를 버린 자를 에테르(하늘의 기운)가 스스로 들어 올리도록!
그는 괴물들을 제압했고 수수께끼들을 풀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내면에 있는 괴물들과 수수께끼들마저 구원해야 한다.
그것들을 천상의 아이들로 변모시켜야 한다.
그의 인식은 아직 미소 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질투 없이 존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넘쳐흐르는 열정은 아직 아름다움 속에서 고요함을 찾지 못했다.
진실로, 그의 갈망은 만족 속에서 침묵하고 가라앉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속에서 그래야 한다!
우아함(Anmuth)은 위대한 정신의 관대함(Grossmuth)에 속하는 것이다.
팔을 머리 위로 괴고, 그렇게 영웅은 휴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휴식마저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바로 영웅에게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격렬한 의지로는 아름다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적게.
바로 이것이 여기서는 많은 것이며,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느슨해진 근육으로, 멍에를 벗은 의지로 서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대들 모두에게, 오 고귀한 자들이여, 가장 어려운 일이다!
힘이 너그러워져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런 내려옴을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에게서 아름다움을 원한다, 오 강력한 자여! 너의 선함이 너의 마지막 자기-제압(Selbst-Überwältigung)이 되기를.
나는 네가 모든 악을 저지를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네게서 선함을 원한다.
진실로, 나는 자신들의 발톱이 무디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는 약자들을 보고 자주 웃었다!
너는 기둥의 덕을 따라야 한다.
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아름답고 섬세해지지만,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고 더 많은 것을 지탱하게 된다.
그렇다, 고귀한 자여, 언젠가 너는 마침내 아름다워질 것이고, 너 자신의 아름다움 앞에 거울을 들이댈 것이다.
그때 너의 영혼은 신적인 갈망에 전율할 것이며, 너의 허영 속에서조차 경배가 깃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비밀이다.— 영웅이 영혼을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꿈속에서,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초-영웅(Über-Held)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고귀한 자들에 대하여』 해설
「고귀한 자들에 대하여(Von den Erhabenen)」는 니체가 진정한 고귀함의 본질을 탐구하는, 깊은 통찰이 담긴 철학적 성찰입니다.
이 장은 겉으로는 ‘고귀해(erhaben)’ 보이지만 내면에 미완의 긴장과 길들지 않은 야성, 그리고 아름다움의 부재라는 그림자를 품은 존재(‘정신의 고행자’)를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그리고 참된 고귀함이란 경직된 자기 절제나 고행이 아니라, 자기 극복을 통해 힘과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융합되고, 마침내 삶을 긍정하는 우아한 경지에 이르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1️⃣ 겉은 고귀하나, 내면에 그림자를 품은 존재: 미완의 고행자
“오늘 나는 한 ‘고귀한 자(Erhabenen)’를 보았다. … 아, 내 영혼은 그의 볼품없는 모습에 얼마나 웃었던가!”
차라투스트라는 “정신의 고행자”라 불리는, 근엄하고 엄숙한 인물을 목격합니다.
그는 진리를 찾아 치열하게 싸우고(“야수들과의 싸움”), 그 결과 얻은 “추한 진실들”과 투쟁의 흔적(“찢어진 옷”, “가시들”)을 자랑처럼 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지함 속에는 아직 “극복되지 않은 야수”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가 숨겨져 있고, 그의 행위 자체는 여전히 그를 덮는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언제라도 뛰쳐나갈 듯 긴장한 호랑이 같고, 세상으로부터 움츠러든 존재입니다.
📌 철학적 의미: 니체는 고귀함을 단순히 진지함, 엄숙함, 혹은 고통스러운 자기 절제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고귀한 자’의 내면에 도사린 미완성—웃음과 아름다움의 부재,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야수성, 경직된 긴장감—을 드러냅니다.
참된 고귀함은 이러한 그림자를 넘어서는 유연함, 자유로움, 그리고 아름다움과의 조화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2️⃣ 진정한 고귀함은 자기 초월에서 피어난다: 자신의 태양 속으로
“그리고 그가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때,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것이며— 진실로! 자신의 태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고귀한 자’는 현재의 자기 자신, 즉 자신이 쌓아 올린 ‘고귀함’이라는 정체성마저 넘어서야만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엄숙함과 고행, 내면의 야수성과 씨름하는 영웅적 단계에 지치고, 그 그림자를 뛰어넘어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태양”—따뜻하고 밝은 자기 완성의 상태—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 그의 행위를 가리던 어두운 손은 사라지고, 그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 심리적 통찰: 이것은 ‘고귀한 자’라는 자기 동일시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합니다.
스스로를 규정했던 진지함과 영웅적 의지마저 내려놓고, 더 높고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이 자기 초월의 과정이야말로 니체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궁극적인 가능성입니다.
3️⃣ 지식이 아름다움과 미소로 승화될 때
“그의 인식은 아직 미소 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질투 없이 존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넘쳐흐르는 열정은 아직 아름다움 속에서 고요함을 찾지 못했다.”
‘고귀한 자’는 인식과 진리를 향한 격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의 인식은 아직 딱딱하고 긴장되어 있습니다.
니체는 그 열정이 아름다움 속에서 고요함을 찾고, 그 인식이 미소 지을 때, 즉 여유와 우아함을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고귀함이 완성된다고 봅니다.
지식은 더 이상 무겁고 추한 전리품이 아니라, 가볍고 밝게 미소 짓는 지혜로 변모해야 합니다.
이러한 승화는 힘의 자기 절제와 아름다움과의 조화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 미학적 전환: 고귀함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쌓거나 진리를 위해 고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을 삶의 아름다움과 웃음, 우아함 속에 녹여내어, 존재를 긍정하는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서 드러납니다.
4️⃣ 고귀함의 완성: 힘과 아름다움의 만남
“힘이 너그러워져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런 내려옴을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니체는 아름다움을 힘의 자기 절제이자 너그러운 발현으로 정의합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힘이 스스로 긴장을 풀고, 위압적인 모습을 거두며, 부드럽고 우아하게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지식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이 과정은, ‘고귀한 자’가 자신의 격렬한 의지와 열정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그는 모든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으되(“나는 네가 모든 악을 저지를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바로 그 힘 때문에 오히려 선함(“Gute”)을 선택하고 실현하는 것(“너의 선함이 너의 마지막 자기-제압(Selbst-Überwältigung)이 되기를”)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극복이자 아름다움의 증거입니다.
이는 발톱이 무뎌서 선한 척하는 약자들의 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윤리적 반전: 약함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선함은 진정한 미덕이 아닙니다.
진정한 고귀함은 악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스스로 제어하고 너그럽게 사용하여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5️⃣ 마지막 초월: 영웅을 넘어선 영혼, 위버-영웅(초영웅)의 도래
“이것이 바로 영혼의 비밀이다.— 영웅이 영혼을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꿈속에서,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초-영웅(Über-Held)이다.”
이 장의 정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고귀한 자’가 영웅의 단계를 넘어 마침내 ‘위버-영웅(초영웅)’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영웅적인 의지와 투쟁마저 넘어서고, 자신을 아름다움 속에 비추며 신적인 갈망에 떨게 될 때, 즉 영웅성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자기 극복 이후의 창조적 고요함 속에서 위버-영웅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정복이나 싸움의 상태가 아니라, 마치 기둥처럼 굳건하면서도 아름답고 섬세하며, 힘과 아름다움이 하나 되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승화된 존재의 상태—자기 존재의 완성이자 삶을 최고로 긍정하는 경지—입니다.
📌 형이상학적 시사: ‘위버-영웅’은 니체의 위버멘쉬(초인) 개념을 완성하는 이미지입니다.
이는 의지적인 투쟁과 정복을 넘어선, 힘과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통합되어 삶 자체를 찬양하고 창조하는 존재의 최고 형태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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